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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처음 만나 선보고, 두 번째 만나 약혼하고, 세 번째 만나 결혼하다 |
글쓴이 :
날짜 : 10-07-14 15:12
조회 : 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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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자정 무렵 도서관을 나와 낙엽을 밟으며 기숙사로 향하는데 왠지 모를 외로움이 물밀듯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난생 처음 짝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학을 준비할 때 결혼을 하고 떠나라던 부모님 말씀도 떠오르고요. 만으로 서른한 살이 되었으니 그 때 한국인 유학생들 가운데서는 아마 가장 늙은 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두어 달 전 여름방학 때 뉴욕의 형 집을 방문하여 친지로부터 와싱턴주에 살고 있다는 한 동포 처녀의 이름과 주소를 얻어온 터라 바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뒤 회답을 받았는데, 이메일이 없던 때라 열흘에 한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았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다는데 한글로 편지 쓰는 것을 보니 순전한 한국인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월 말 겨울방학을 맞아 스키여행을 구실로 와싱턴을 방문했습니다. 맞선을 보자면 부담을 가질 것 같아 스키 타러가는 길에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이지요. 여비를 아끼기 위해 비행기 대신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탔더니 텍사스에서 와싱턴까지 꼬박 이틀 밤낮이 걸렸습니다.
버스로 가는 동안 해가 바뀌어 1987년 1월 1일 아침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두툼한 스키 점퍼 차림의 방문객을 그녀의 두 오빠들이 가장 따뜻하게 맞아주더군요. 이틀 동안 그녀의 집에 머무르며 낮엔 그녀와 데이트하고 저녁엔 오빠들과 술시합을 벌이다 다시 그레이하운드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는 길에 와싱턴 아래 오리건 (Oregon)에서 스키를 타보기는 했고요.
학교로 돌아와 뜸을 좀 들인 뒤 청혼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물려받을 것은 땅 한 줌도 없이 가진 것이라곤 책 보따리 몇 개뿐인 가난한 유학생이지만 앞으로 잘 살 자신이 있다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저보다 더 뜸을 들이다 회답을 보내더군요. 가족회의를 열었는데 일부 친척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미 저와 술친구가 되어버린 두 오빠들의 적극 지지로 집안에서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고요.
3월 중순 봄방학을 맞아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습니다. 뉴욕의 형과 형수도 불러 약혼식을 가진 것이죠. 그리고 5월 중순 여름방학을 시작하자마자 뉴욕으로 날아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월의 처음 만남이 맞선, 3월의 두 번째 만남이 약혼, 5월의 세 번째 만남이 결혼이었으니,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후다닥 해치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속도전을 폈다니 '혹시' 하고 엉큼하게 의심하는 분들이 더러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속도위반'은 결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벼운 '접촉사고'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비리가 혼전에 들통날까봐 그런 것도 절대 아니었고요.
첫째는 앞에서 고백했듯 가을밤 낙엽을 밟으며 맛본 형언하기 어려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둘째는 눈감기 전에 '막둥이 손주'까지 보고 싶다는 70을 넘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엄청난 외로움과 조그만 효도를 핑계로 번개 결혼을 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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