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일수교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주선한 것은 안보와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공조가 필요했고,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가 한일관계 개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면 일본이 미국 대신 한국에 원조할 수 있고 한미일 삼국조약 (tripartite treaty)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는 주한미군의 핵무기 배치였다. 1950년대 중반 북한 병력은 약 35만 명이었는데 남한 병력은 두 배가 넘는 72만 명이었다. 남한은 미국의 원조로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이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남한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재정의 70% 이상을 국방비로 쓰면서도 무력 북진통일을 이룰 때까지 병력을 조금도 감축할 수 없다며 미국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이승만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며 남한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미국의 군사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핵무기를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58년 1월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하고 1959년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급격히 줄이면서 이승만을 더욱 압박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여전히 한일협상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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