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반년 쯤 지난 1987년 11월 서울의 가족들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머님이 장암으로 위독하시다는 것이었지요. 막내아들이면서도 초등학생 때부터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 유학 (遊學)했던 저로서는 어머님을 생전에 뵙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었습니다.
신혼살림을 차린 지 겨우 몇 개월째였지만 아내의 눈치를 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2-3주만 있으면 한 학기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TA를 하고 있었지만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집안일과 장사는 아내에게, 강의를 비롯한 학교 일은 동료 TA에게 맡기고 4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지요.
한 달 반쯤 어머님 곁을 지키다 1988년 1월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학교로 돌아가려는데 미국행 비자가 거부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국에서 송금한 증명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한국으로부터 돈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미국에 거주하는 형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거나 장사로 생활비를 벌었다는 등의 얘기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TA 월급을 아껴 학비와 생활비로 충당했다고 우겼지만 비자 심사관은 참 냉혹했습니다.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내는 1970년대에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하여 영주권을 지니고 있던 터여서 시민권을 신청해 갖게 하고 저를 초청하도록 한 것이지요. 아내가 한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이 되는 한편 제가 흔히 '그린카드 (greencard)'로 불리는 영주권을 갖게 되었던 배경입니다.
미리 밝힙니다만, 영주권은 1994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미련 없이 반납했습니다. 유학 비자가 거부되었기에, 합법적으로 미국에 다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주권을 받은 것이지, 말 그대로 미국에 오랫동안 또는 영원히 살고 (永住) 싶은 생각은 애초부터 손톱만큼도 없었으니까요.
참고로 미국의 국토안보부에 따르면 미국 내 한인 불법체류자가 2009년 기준으로 2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한인단체들이나 이민 관련 변호사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으리라 추정하고요.
아무튼 우리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2위 안팎을 기록하고 있는 21세기에도 수십만의 한인들이 갖은 고통과 핍박 속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며 미국 영주권에 목을 매는 이유가 뭘까요?
|